지나간 이야기들
by funnybunny
유지니아











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사건은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거의 사고에 가까운 게 아닐까요?

어떤 우연한 계기에 눈덩이가 비탈을 구르기 시작해요.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눈 깜짝할 새에 커져서 산기슭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거든요. 물론 눈덩이의 중심에는 인위적인 조작도 있고 억눌려 있던 감정도 있겠죠. 하지만 난 어떤 계기와 우연의 연속이 맞물리면서 인위적인 걸 능가하는 무서운 일을 일으킬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. 인간의 하찮은 속셈을 비웃기라도 하듯 크나큰 재앙으로 답하는 거예요.




어느 지방의 집안 잔칫날에 배달되어온 술과 음료수. 덕분에 그 집안에 모여있던 17명이 대량 독살 사건의 희생자가 됩니다. 살아 남은 것은 눈먼 그 집안의 딸 히사코.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이 유지니아입니다. 첫 장부터 해서 화자는 계속 변경됩니다. 독자는 지금 사건 관계자들 중심으로 돌아다니면서 만나고 있는 - 화자가 얘기하고 있는 상대인 '당신'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독서를 해야 하지요. 화자는 그 주변 인물로 바톤 터치되는가 하면 또한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3인칭의 한 소녀가 되기도 합니다.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또는 조금은 거리를 두고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애매모호하게 매듭지어졌던 이 사건과 아직도 떠돌고 있는 어쩐지 수상한 공기들이 사람들의 입에 올려져요.

굳이 인식한 적은 없지만 전 한 이야기 안에서 화자가 변경되어가는 이야기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. 온다 리쿠상이 자주 쓰시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. 여기서도 화자들의 증언은 계속되는데 사람마다 증언이 제각각이라 전부 이야기가 다르다는 인상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이런 시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결론지었지만 사실 그 연유는 그게 아니었다 또는 그렇게 보였지만 겹겹이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식으로 제각기 본 방향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겹치고 겹쳐서 뒤에 드러난 진실은 앞의 사람의 생각을 뒤집거나 뒷받침하기도 하고 때론 물음표를 만들기도 합니다. 한 개인의 시선이 갖는 한계성. 제가 이 형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것일지도. 화자들도 자기 생각뿐일 수도 있다고 - 불확실성에 비중을 둔 견해라는 것을 아는 인상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인상에 관한 것들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였던 것 같아요.

그리하여 겹겹이 쌓여있다가 점점 껍질을 벗는 사건 관련 에피소드는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날 때의 강도가 큰 것들이예요. 후반부에 드러났던 하나의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.

끝까지 그냥 책의 시선을 따라가리라는 생각으로 읽었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짜 진실을 볼 수 있을까 아예 끝까지 이렇게 묻혀버리지나 않을까 싶어 그 부분에 관해서는 큰 기대 안했는데 오히려 그런 생각을 깨부수듯 예상 이상의 선은 넘어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알 수 없었어요. 보일듯 말듯 닿을듯 말듯 - 단서처럼 뿌려진 하지만 해답을 주지 않은 궁금증들도요. 이 작품이나 바로 앞의 작품이나 충분히 사계절 즐길 수 있겠지만 여름에 나오기에 꽤 어울리는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. 출판사에서도 그 점을 겨냥해서 맞추어 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.



유지니아. 나의 유지니아.
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.
아직 먼 여명에 떨던 날들도 오늘로 끝을 고하리니
이제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.
나의 입술에 떠오르는 노래도
아침 숲에서 나의 신발이 짓밟는 벌레들도
쉴 새 없이 피를 내보내는 나의 작은 심장도
모두 당신에게 바치리.





소설 속에서 접하게 되는 계절도 여름. 책이 나온 지금도 여름. 덕분에 '이 더위는 대체 언제 끝나려나요' 하는 구절에 이입. 끈적끈적함을 느끼던 중 결국 선풍기를 틀었는데 때 맞추어 내용 때문에도 팔에 살짝 소름이 돋기 시작했던 것입니다. 내용도 다루는 소재도 더 무서운 것이 많을텐데 어쩐지 이 소설에서 소름돋는 오싹한 뒷맛을 느꼈어요. 중학생 때 시험 전날 어쩔 수 없이 벼락치기를 하던 중 틀어놓은 음악이 살짝 다른 분위기로 흐른다던가 그 순간 어쩐지 살짝 열려있는 방문과 그 사이로 보이는 거실의 어둠이 등 뒤로 갑자기 신경쓰이는 것처럼 말이지요. 그런데 어제 모처럼 그런 기분이 되었던 것입니다.

마침 초저녁부터 잠든 막내가 깨서 나왔기에 옆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재구성해 들려주면서 읽었어요. 몇 장이 지나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 다른 형태로 연관된 어떤 인물의 인생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막 읽으려던 참이었는데 시간 순서대로 구성해서 들려주고 그 이후로는 읽으면서는 새로 튀어나온 관련 사실들을 들려주니 흥미있어 하더군요.

이것저것 쌓아놓고 읽다가 유지니아를 덮으니 3시 정도 되었는데 일어난 시간은 6시 반. 그것도 꽤 번쩍 떠져서 놀랐어요. 이러다가 나중에 졸릴지도 모르겠지만.



+ 2006년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
+ 개인적으로는 어젯밤 오랫만에 불끌 때 긴장했어요.
+ 밸리를 돌다가 트윈픽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글귀 발견.
+ 어제부로 도코노 이야기 2.3 도착.
















by funnybunny | 2007/07/27 08:30 | 책을읽다 | 트랙백 | 덧글(0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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